[3회 아카데미] 2강 - 과거의 노예제도, 현대의 노예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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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유엔인권정책아카데미 <역사로서의 현재>

2강 : 과거의 노예제도, 현대의 노예

- 염운옥,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교수

 

오늘날에도 노예노동이 존재한다. 5,000년 인류역사상 계속 이어온 노예노동의 문제, 그 정의는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재생산하는 임금을 받지 못하고 강요당하는 모든 노동은 노예노동이라 할 수 있다. 최저임금 역시 최저한의 선으로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을 강요받은 경우도 노예노동이다. 이른바 제3세계 아동노동, 성매매(인신매매를 통해 감금 및 노동시키는 경우) 등 노예노동의 현실은 인류역사와 함께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늘 강의 내용은 현대의 문제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 아닌,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대에 행해졌던 노예노동과 노예제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과거에만 머물러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그림자는 비백인 혹은 백인의 입장에서 타인종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형태로 현대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피해자들은 흑인이라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고,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피부색과 ‘흑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해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반드시 흑인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와 서양 중세 시대의 노예는 모두 백인이었으며, 당시에는 유럽인들끼리 같은 인종을 노예로 삼았었다. 또한 ‘노예’라는 말의 어원 역시 슬라브인을 뜻하는 ‘스클라부스(sclavus)’로부터 비롯된다. 고로 동유럽의 슬라브족이 노예였다는 뜻이다.

 

흑인노예에 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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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답은 모두 "no"이다. 먼저 흑인을 노예화한 것은 이슬람이었다. 7세기부터 이슬람인이 유럽인, 특히 슬라브인을 노예로 만들었고 같은 시기 사하라사막 횡단 노예무역이 진행되었다. 노예시장에 노예를 팔게 되면서 흑인들이 처음으로 노예로 팔리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이후 16세기부터 흑인을 노예화했다.

 

유럽인이 노예사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흔히 알고있는 것처럼 숲속에 노닐고 있는 흑인들을 유럽인들이 사냥해서 줄에 둘러 파는 형태로 노예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시 아프리카 부족 간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노예로 삼는 관행이 있었다. 이 때, 유럽인들이 전쟁포로들을 사기 시작했다. 즉, 아프리카인은 노예무역에서 피해자·희생자임과 동시에 공범이었다. 19세기 말이 될 때까지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내부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고 거점에만 들러 아프리카인을 사갔다.

 

아메리카 대륙의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면서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나 처음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을 사용했다. 그러나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점령하면서 퍼뜨린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던 인디언들의 인구가 1/3로 줄어버렸고 정벌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다. 이러한 인구 감소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어지면서, 죄수 등 백인과 노예계약을 맺고 아메리카로 그들을 송출했다. 이 숫자 역시 부족해지자 아프리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역이라는 개념을 더하게 되면서 노예무역은 국제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이 되었다. 먼저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가서 대포와 총 등 사치품을 주고 노예를 샀고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로 향했다. 그리하여 영국-아프리카-아메리카의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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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무역

 

노예제의 최대 수혜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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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주요 항구도시별 노예무역 거래량(1642-1807)

 

영국은 노예제도에 있어서 특수한 역할을 했다. 거래물량과 부의 축적에 있어서 압도적인 전세계 1등 국가다. 그러나 영국 안에서는 노예가 보이지 않았다.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실어서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으로 곧장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안에서 가시적이지 않았던 노예는 영국의 경제와 사회를 떠받쳤다. 이처럼 영국과 노예제 간의 관계의 특성은 비가시성과 편재성의 공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은 가장 먼저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은 “우리가 노예제와 노예무역이라고 하는 비인간적인 관행을 실시한 것은 맞지만, 가장 빨리 폐지했기 때문에 도덕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07년, 노예제 폐지 200주년 이전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할 것 없이 모두가 노예제에 관해 침묵하고 있었고,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2007년에 대규모의 기념행사가 있었던 것은 영국 내 흑인 공동체의 영향력이 커지고 다문화사회 내에서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200주년 기념 당시 부각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노예가 된 흑인, 아프리카인인 올라우다 에퀴아노였다. ‘노예’라는 집합명사를 쓰면 노예가 되기 이전의 삶이 사라지는 효과가 발생하는데, 이는 노예가 된 사람에 대한 굉장한 실례이자 역사적으로 무엇인가를 놓치게 한다. 따라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enslaved Africans)’이라는 용어가 더 올바르다. 이렇게 칭했을 때 비로소 원래 아프리카인인 사람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강제이주 당한 역사적 사실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이다.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 올라우다 에퀴아노(Olaudah Equ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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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라우다 에퀴아노와 그의 자서전

 

올라우다 에퀴아노(이하 에퀴아노)는 지금의 나이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 부족 족장의 아들이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어린 시절 집에서 놀고 있는데 동족일 가능성이 큰 노예사냥족에게 잡혀 노예시장에 팔리고 아메리카 버지니아의 농장에 팔려갔다고 쓰여있다. 해군장교의 노예로 7년 전쟁에도 참가하고, 노예로 일하는 와중에 뛰어난 재능으로 돈을 모아 인본주의적 퀘이커인 노예주로 인해 해방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다가 말년에 영국에 정착하여 노예제 폐지운동가가 되었다.

 

보통 노예로 팔리면 노예주가 노예를 원래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데, 이는 지배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에퀴아노는 처음에 ‘마이클’이라는 부름에 대답할 때까지 맞고 길들여졌다. 또 다른 주인에게는 ‘제이콥’으로 불리는 등 자기정체성을 완전히 부정당하는 존재였다. 이외에도 ‘구스타부스 바사(Gustavus Vassa)’라는 이름도 있었다. 이는 스웨덴 국왕의 이름인데, 가장 비천한 노예에게 국왕의 이름을 붙이는 일종의 놀림이었다. 그러나 에퀴아노는 백인 여성과 결혼했을 때를 비롯하여 공식적인 활동을 할 때에는 그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데 굳이 자서전에는 ‘에퀴아노’라는 본명을 사용함으로써 아프리카 정체성을 나타내고 자신의 근원을 명시했다.

 

그의 자서전은 여러 가지 목소리, 불협화음을 내는 모순적인 이야기들이 한데 합쳐져 있다. 흑인노예의 획득 방법(예: 동족에 의한 납치), 동족끼리의 계속된 전쟁, 유럽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더욱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고 대규모로 노예를 팔았던 역사 등도 담겨있다. 또한 그의 성공담과 더불어 노예제 폐지에 관한 정치적 담론 등 굉장히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노예는 ‘말을 하는 짐승’으로 불렸고 읽고 쓰는 것 또한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런데 에퀴아노는 자서전을 썼다. 자기 이야기를 글로, 그것도 500페이지가 넘는 책으로 썼다. 자연히 대필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영어 제목을 보면 ‘그 자신이 쓴(written by himself)’ 것이라고 쓰여있다. 결국 대필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여전히 문학인지 여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즉,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자서전으로 볼 것인지, 일부 상상력이 부여된 문학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노예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은 노예라고 하는 존재가 한없이 수동적이고 희생만 당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 당시 노예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담론, 즉 ‘그러니까 노예야’라는 주장에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자서전 표지에는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고 빨간 정장을 걸치는 등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잘 차린 옷차림에 허리를 꽂꽂이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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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간도 형제도 아니라는 말인가요(Am I not a man and a brother?)’를 애원하는

수동직인 노예를 그린 이미지. 계속적으로 복제되어 보석함, 찻잔, 담배값 등 일상적으로 널리 쓰였다.

 

반면, 상단의 이미지는 백인 노예폐지운동가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다. 노예를 영원히 수동적인 이미지에 묶어버리고, 시혜나 호의 차원의 문제가 아닌 인권적 차원의 접근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비판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저 백인 노예폐지운동가 또는 선의나 자비심이 넘치는 노예주인이 해방시켜주는 이야기의 대상, 그것이 애원하는 주먹 뒤편의 주체이다. 마치 오늘날의 공정무역, 착한 소비를 하자고 하는 것의 19세기 버전이다. 왜냐하면 착한 소비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반면, 문제를 약간 개선하여 더욱 지속성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항구에 수용되어 배에 태워질 때, 작은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떠있는 큰 노예선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있었다. 도망갈 기회는 그때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 도망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거나 다시 잡혀왔다. 이외에도 농장에서 일을 대충하거나 사보타지(sabotage) 행위와 같은 일상적인 저항과 성공적인 도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노예선에서 일어난 노예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는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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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선 갑판 위에 짐짝처럼 묶여 운송되는 노예들의 이미지. 이 이미지 역시 실상과 다르나

노예수용소 방문지에서 팔리고 있는 티셔츠 등 무한반복 복제되었다.

 

노예제도가 남긴 것

 

가장 중요하고 부정적인 결과는 흑인에게 노예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달라붙게 된 것이었다. 노예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인데,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흑인들이 노예가 되면서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는 노예는 곧 흑인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때문에 백인의 특성과 흑인의 특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현재도 존재한다. 한편 흑인이라는 몸에 온갖 열등한 표식이 있기 때문에 유색인은 얼굴은 검지만 백인이고 싶은, 백인을 닮고자 하는 분열된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에퀴아노 역시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고 싶은 부정적인 자의식과 이중적 의식을 자서전 곳곳에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백인의 얼굴을 보고 세수를 했으나 아무리 씻어도 하얘지지 않아 부족함을 느꼈던 이야기와 기차 안에서 백인 소녀가 자신을 보고 ‘더럽다’고 얘기했을 때 위축되었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흑인 역시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가 없고 백인이라고 하는 ‘정상적인 모델’의 눈으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내면화되었다. 아프리카적인 정체성과 영국 문명에 대한 신뢰, 노예제를 운영하지만 그러한 제도를 없앤다면 영국의 문명이 훌륭하기 때문에 동화되고 싶어하는 자신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이 드러난다.

 

그러나 ‘흑인’이라는 범주가 자의적인 것처럼 ‘백인’이라는 범주 역시 자의적이긴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유대인은 백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고 이민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미국에 새롭게 도착한 백인들은 ‘아직 백인이 아닌 사람(not yet white)’, 아일랜드인은 ‘하얗지만 흑인과 같은 사람(white negro)’으로 칭해졌었다. 즉, 인종은 역사적 계기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없어지기도, 새롭게 구성되기도 한다. 흑인이라는 사실과 노예라는 사실의 연결에는 특정한 역사적 배경, 노예제가 있다.

 

 



강사 염운옥은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이다. 전 『역사비평』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지은 책으로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 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학』, 함께 쓴 책으로 『몸으로 역사를 읽다』, 『대중독재와 여성』, 『일상 속의 몸』, 『기억과 몸』 등이 있다. 역사학의 주제로서 ‘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몸이 놓이는 장소로서 ‘공간’, 몸의 이동 현상으로서 ‘이주’, 타자의 몸에 대한 담론으로서 인종주의 등을 공부하고 있다(출처: 자유인문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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