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아시아인권위원회 회의 참관기

201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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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이 정상이다

- 홍승기(KOCUN 활동가)


 

  19944월 르완다 학살이 일어났다. 르완다 다수종족인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비행기 격추사고로 숨지면서 후투족은 이 사고를 소수종족인 투치족에 의한 암살로 간주하고 투치족은 물론 중도파 후투족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이 사건에서 약 8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과 아동까지 칼에 의해 머리가 잘려나가고 곤봉으로 맞아 죽었다.

 

  세계 빈국에 경제원조, 식량조달, 의료봉사 등을 진행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학살을 앞둔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돈, 식량, 의약품이 아니라 안전이었다. 누군가 그들을 위협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의식주가 아무리 중요해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거나 살아있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 이것을 힘으로 빼앗을 수 있다면, 삶의 질은 개선될 수 없다.

 

  ‘Locust Effect’라는 책은 위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반 시민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할 의무는 누가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보호체계가 갖추어 졌음에도 제 기능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앞으로 경찰제도와 사법체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하는지 등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The Locust Effect: Why the End of Poverty Requires the End of Violence (2014)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아시아인권위원회(Asian Human Rights Commission)1주일간의 회의를 개최했다. 여러 아시아 국가의 인권활동가, 변호사, 기자, 경찰, 국회의원 등이 한 자리에 모여 각국의 사법체계, 경찰제도, 그리고 전체적인 인권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회의는 ‘Locust Effect’에서 나온 주제를 바탕으로 진행이 됐다. 다양한 국가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많았고, 다른 국가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뜻 깊은 기회였다.

 

  회의에서는 경찰이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왜 적절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지에 대한 논의가 많은 시간을 차지했다. 참가자들의 의견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자기 나라의 경찰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남아시아 참가자들이 많아 해당 지역 경찰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는데, 영국 식민지가 많았던 남아시아의 경우 많은 국가들이 영국의 아일랜드 경찰제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당시 저항이 가장 심한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경찰을 통해 국민을 강하게 억압할 필요가 있었고, 이 경찰은 군 제도를 기반으로 했다. 따라서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을 피지배층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고,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이 아닌 군사훈련을 받아 보호보다는 진압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1800년대 프랑스 파리의 상황도 앞서 언급했던 것과 비슷하다. 당시 파리 경찰은 대중의 안전이 아닌 체제 유지에 목적을 두고 있었고 훌륭한 상류층위험한 하층민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임무였다. 또한 고용주인 부유층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임금인상과 재물손괴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력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미국, 일본 등의 국가의 예가 언급됐는데 모두 상황이 비슷했다.

 

  이에 따라 위 국가들에서 대중은 경찰을 폭력적이고 무능한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변화를 열망하는 기자, 학자, 변호사, 정치인 등 모두의 관심과 노력으로 경찰제도의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국가 간 정보와 모범사례를 공유하며 각국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문제를 고려하여 개선 방안을 찾았고, 경찰은 시민들에게 인정받고 신뢰받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에서는 독립 후에도 위 국가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문제는 물론 경찰과 사법기관의 구조적 문제까지 그대로 껴안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들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부조리한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우리나라도 식민지 생활을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에 비슷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법이 약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Locust Effect’에서 언급된 흥미로운 점이 있었는데, 경찰제도와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문제 삼지만, 사실 계획된 대로 충실하게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모순된 제도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을 바꿔야한다고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불합리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제도일수록 체계화된 내부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경찰제도와 마찬가지로 많은 나라에서 사법체계 또한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약자를 적절하게 보호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이 언급됐다. 또한 사법체계가 정치적 영향을 받으면서 정의구현이 아닌 정치적 목적과 이익에 따라 이용된다는 것이 언급됐고, 사법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보다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회의에 참가했던 한 변호사는 자신이 한 사건을 맡았을 때 좌절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분명 자신의 의뢰인은 죄가 없고 유리한 증거를 많이 가지고 있어 승리를 확신했지만, 결국 소송에서 패했다고 했다. 결과를 이해할 수 없어 항소를 했지만 상대 변호사가 나중에 찾아와 자신의 의뢰인이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당신이 이길 수 없으니 빨리 포기하라는 말을 전했다고 했다.

 

  한 참가자의 국가에서는 폭행과 같은 단순 사건에 대한 판결도 내려지는데 1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떤 경우에는 재판과정이 지연돼서 재판 전 구금된 기간이 실제 혐의에 대해 기소됐을 때의 형량보다 길다고 했다. 반면 돈이 있는 사람은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뇌물을 제공해 절차를 단축시킬 수 있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법에 대한 지식이 없고, 변호사를 선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고 무고한 경우에도 혐의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홍콩 아시아인권위원회 회의(A Study Session on public justice systems and the protection of citizens) 현장



  회의에 참가하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의 상황이 회의 참가자들의 국가들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아 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회의에서 한국 관련 사례를 언급해도 큰 반응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어떨 때는 다른 나라의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한국에 대한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인권활동가들이 살해 위협을 받고 죄 없는 사람들이 사법체계의 허점 때문에 죽어나가고 더욱 깊은 빈곤에 빠지는 일이 빈번한 것과는 달리, 한국은 비교적 안전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참가자들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자의적 구금, 공권력의 과도한 무력 사용, 공공기관 부정부패 등과 같은 일은 한국에서도 현재 일어나고 있고 분명히 개선돼야 한다

 

  한국의 상황보다 심각한 예를 많이 접했지만, 분명 배울 점도 있었고 희망을 갖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반테러법이 제정됐는데, 진보 정치인들의 노력으로 개인에게 근거 없이 테러 혐의를 씌워 구금을 한 것이 밝혀질 경우, 경찰에게 미화 10,000불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는 조항이 최근에 추가됐다고 한다. 법의 변화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해당 법 조항 때문에 테러에 대한 근거 없는 구금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누군가 앞에 나와서 발표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 주제만 던져주고 회의 시간 대부분 참가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히 정해진 형식이 없었고 논의의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자유롭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솔직함으로 인해 참가자들의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도 재미있었고 다양한 의견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다른 국가의 상황에 대해서 배운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회의가 진행 될수록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한국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면서,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회의 중에 들었던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전진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는데, 후퇴를 얼마만큼 막느냐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한국의 민주주의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최근 많이 후퇴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경찰제도가 개선된 위 국가들을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이 아니고 정의를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쓴 사람들이 있었기에 변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경찰제도 및 사법체계의 변화를 위해, 또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노력은 물론 대중의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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