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껀터는 5대 도시에 해당하는 대도시이며 메콩강 하류에 있는 농업 기반 도시로 호치민시에서 150km정도 떨어져 있고, 베트남 생산 쌀의 50%를 담당한다. 날씨가 따뜻하여 1년 내내 30도가 넘는 날씨로 2기작, 3기작을 할 수 있다. 먹을 거리가 풍부하고 주변의 여러 성(한국의 도와 같은 지역)에 둘러 쌓여 있어 물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내가 담당하게 된 학생들은 한국 베트남 결혼 2세들로 14~17세의 청소년들이었다.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 6년이상 살다 온 학생들이어서 한국어가 능숙한 편이었다. 발음도 완벽하고 몇몇 학생들은 글을 쓰는 능력도 꽤 훌륭했다. 다만, 기관의 특성 때문에 한국에서 살다 이혼 후 어머니를 따라 베트남으로 돌아온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이모나 외삼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았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머니가 대도시에서 경제활동을 하기에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경우도 드물었다. 한국어 첫수업에서 학생들은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는 학생, 수업 중에도 마스크를 안 벗는 학생,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학생 등 낯가림과 사회성이 부족해 보였다. 베트남 정규 수업이 없는 토, 일요일에 한ᆞ베 가정을 위한 한글교실을 여는데 7개 반이었다. 대부분 베트남인 한국어 선생님들이 가르쳤는데 한국어가 뛰어나고 호기심이 많은 한 학생의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여 초등학생인 학생도 중간에 우리 반으로 들어왔다.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유치원을 한국에서 다니다 왔는데 베트남에 오니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학생, 한국에서 8년 동안 살았지만 섬에서 제대로 된 친구와 사랑을 못 받았던 학생, 언니는 한국에 아버지와 살고 자신은 베트남에서 이모와 사는 학생 등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 속의 한국은 풍요롭고 부유한 곳이었지만, 따뜻했던 곳인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한국의 우유 맛을 기억하고 있었고 건물과 동네도 기억했다. 떠날 때의 슬픔도 도착해서의 낯섦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과 다른 우유 맛, 공기, 건물, 동네, 행동, 말 등.
곤충을 좋아하고 유독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들도 힘들어했고, 수업과 상관없는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과 과학 질문만 계속하는 학생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이가 너무 어려운 것을 물어본다고 했다. 과학 선생을 한 경험이 있어, 쉬는 시간에 학생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도망만 다녔다. 어느 날 수업 중에 학생이 모르는 바이러스 관련 얘기를 하게 됐는데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찾아보고 답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 뒤로 학생은 나를 보면 뛰어와서 바이러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과학 세미나를 하는 것 같았다. 간혹 신기한 곤충을 보면 그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학생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언제나 마스크를 썼던 수줍음 많은 학생은 누구하고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친구의 장난이 좀 지나쳐도 자기의 말에 누군가 끼어들어도 아무 말없이 먼저 말하게 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한국으로 다시 공부하러 가기 위한 준비를 도와주며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았다. 치아 교정을 하고 있었다. 국적 문제로 베트남 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검정고시를 본 후 한국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같이 살며 학업을 계속하려고 했다. 이모와 같이 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아이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주말 한글교실 학생들이었다. 많이 가까워져 농담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자신의 불만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해서 놀랐다. 자신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이 학생은 가장 큰 아픔이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학생도 자신의 아픔을 안고 있었다.
일요일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은 한국에서 오래 살다 온 편이었지만 한국어 실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좀 떨어졌다. 교회에 다녀서 일요일 수업은 못 들었지만, 학생은 심성이 착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고립된 곳에서 살다 보니 언어가 늘지 못한 것 같았다. 또한 불안했던 마음을 교회를 통해 치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래를 잘 부르고 목소리가 참 좋았다. 성가대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했다. 대부분 가볍게 장난을 치면 놀래거나 싫어했는데 이 학생은 불편해하지 않았다. 아마 교회 사람들과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것 같았다.
말을 할 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불만을 제기하는 학생이 있었다.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투덜거렸다. 사춘기를 겪고 있었고 동생과 할머니와 지내다 보니 외골수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체스를 좋아했는데 바둑이나 장기도 배워보라고 했더니 체스의 역사를 말하며 체스가 제일 좋다면서 휴대용 체스판을 들고 구석에서 체스를 두던 학생이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있는 학생을 봤는데, 휴대용 장기판을 사서 혼자 씨름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두는 법을 알려주고 한 판을 같이 두었다.
집이 가까워 기관에 꾸준히 왔던 학생이 있었다. 학생들의 다양성을 위해 간단한 로봇 수업을 했는데 갑자기 복잡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건 좀 어려운 거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학교 과제라 도와달라고 했다. 많은 시간을 도와주지 못했는데 어느 날 거의 완성된 차를 가지고 왔다. 기대한 것보다 잘 만들었다. 어떻게 했냐고 했더니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혼자 공부하면서 만들었다고 했다. 전국 과학경시대회에 자신의 차가 나가게 됐다고 했다. 시험기간과 겹쳐서 너무 힘들어 했다. 이곳도 입시 경쟁은 치열했다. 대회 성적이 가산점이 되었다. 처음에 재밌어서 혼자 공부하면서 하던 학생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글 맞춤법이 많이 틀려서 연습을 시켰었는데 만화가가 꿈이었던 이 학생은 베트남어로 쓴 소설을 보여주었다. 분량과 상상력에 놀라웠다.
수업에 거의 나오지 않는 학생이 있었는데 수필을 쓰는 시간에 쓴 글은 잘 써서 놀라게 했다. 한국어에 자신이 있으니 더 배우고 싶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수업 중에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된 학생은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상당히 잘했는데 새로운 영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의 뜻과 달리 계속적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는 자신의 무력감을 말했다. 학생의 장래와 여러 고려를 통한 것이겠지만 겨우 적응하고 사귄 친구들과 헤어지는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너 자신을 잃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이 두 학생과는 오래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수업은 한국어 말하기를 잘하는 학생들이라 쓰기를 위한 연습을 시켰다. 시, 수필을 써보았고 가능하면 소설까지 써보려 했지만 시간적으로 부족하였다. 하지만, 끝날 즘에 두 학생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 수업시간에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많이 틀려 놀랐지만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라고 생각했기에 다양한 사회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다. 기후변화, AI, 반도체, 청소년 문제, 세대 갈등 등 학생들이 직접 겪고 있는 것들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생각 밖으로 어려워할 것으로 생각했던 반도체, AI를 많이 기억하였고 재미있어 했다. 물로켓도 만들고 동영상도 만들고 음식도 만들었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아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좀 더 소화하기 쉽게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라온 환경에서 한국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베트남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어린 나이에 가난과 이별을 감당해야 했던 아픔이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문장을, 아름다운 목소리를, 해박한 지식을, 따뜻한 배려를, 놀라운 집중력을 자신의 안에 숨겨 두고 자신의 아픔으로 꽁꽁 감싸 두었다가 누군가 들어줄 때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것이다. 이들은 사춘기고 누군가 돌봐 주어야 할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다시 꿈을 꾸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길 바란다.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경계에서 일어났다. 동서양의 변방에서 헬레니즘이 피어났던 것처럼 그들은 한국과 베트남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새로운 미래이다.
베트남 껀터는 5대 도시에 해당하는 대도시이며 메콩강 하류에 있는 농업 기반 도시로 호치민시에서 150km정도 떨어져 있고, 베트남 생산 쌀의 50%를 담당한다. 날씨가 따뜻하여 1년 내내 30도가 넘는 날씨로 2기작, 3기작을 할 수 있다. 먹을 거리가 풍부하고 주변의 여러 성(한국의 도와 같은 지역)에 둘러 쌓여 있어 물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내가 담당하게 된 학생들은 한국 베트남 결혼 2세들로 14~17세의 청소년들이었다.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 6년이상 살다 온 학생들이어서 한국어가 능숙한 편이었다. 발음도 완벽하고 몇몇 학생들은 글을 쓰는 능력도 꽤 훌륭했다. 다만, 기관의 특성 때문에 한국에서 살다 이혼 후 어머니를 따라 베트남으로 돌아온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이모나 외삼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았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머니가 대도시에서 경제활동을 하기에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경우도 드물었다. 한국어 첫수업에서 학생들은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는 학생, 수업 중에도 마스크를 안 벗는 학생,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학생 등 낯가림과 사회성이 부족해 보였다. 베트남 정규 수업이 없는 토, 일요일에 한ᆞ베 가정을 위한 한글교실을 여는데 7개 반이었다. 대부분 베트남인 한국어 선생님들이 가르쳤는데 한국어가 뛰어나고 호기심이 많은 한 학생의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여 초등학생인 학생도 중간에 우리 반으로 들어왔다.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유치원을 한국에서 다니다 왔는데 베트남에 오니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학생, 한국에서 8년 동안 살았지만 섬에서 제대로 된 친구와 사랑을 못 받았던 학생, 언니는 한국에 아버지와 살고 자신은 베트남에서 이모와 사는 학생 등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 속의 한국은 풍요롭고 부유한 곳이었지만, 따뜻했던 곳인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한국의 우유 맛을 기억하고 있었고 건물과 동네도 기억했다. 떠날 때의 슬픔도 도착해서의 낯섦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과 다른 우유 맛, 공기, 건물, 동네, 행동, 말 등.
곤충을 좋아하고 유독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들도 힘들어했고, 수업과 상관없는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과 과학 질문만 계속하는 학생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이가 너무 어려운 것을 물어본다고 했다. 과학 선생을 한 경험이 있어, 쉬는 시간에 학생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도망만 다녔다. 어느 날 수업 중에 학생이 모르는 바이러스 관련 얘기를 하게 됐는데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찾아보고 답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 뒤로 학생은 나를 보면 뛰어와서 바이러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과학 세미나를 하는 것 같았다. 간혹 신기한 곤충을 보면 그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학생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언제나 마스크를 썼던 수줍음 많은 학생은 누구하고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친구의 장난이 좀 지나쳐도 자기의 말에 누군가 끼어들어도 아무 말없이 먼저 말하게 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한국으로 다시 공부하러 가기 위한 준비를 도와주며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았다. 치아 교정을 하고 있었다. 국적 문제로 베트남 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검정고시를 본 후 한국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같이 살며 학업을 계속하려고 했다. 이모와 같이 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아이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주말 한글교실 학생들이었다. 많이 가까워져 농담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자신의 불만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해서 놀랐다. 자신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이 학생은 가장 큰 아픔이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학생도 자신의 아픔을 안고 있었다.
일요일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은 한국에서 오래 살다 온 편이었지만 한국어 실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좀 떨어졌다. 교회에 다녀서 일요일 수업은 못 들었지만, 학생은 심성이 착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고립된 곳에서 살다 보니 언어가 늘지 못한 것 같았다. 또한 불안했던 마음을 교회를 통해 치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래를 잘 부르고 목소리가 참 좋았다. 성가대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했다. 대부분 가볍게 장난을 치면 놀래거나 싫어했는데 이 학생은 불편해하지 않았다. 아마 교회 사람들과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것 같았다.
말을 할 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불만을 제기하는 학생이 있었다.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투덜거렸다. 사춘기를 겪고 있었고 동생과 할머니와 지내다 보니 외골수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체스를 좋아했는데 바둑이나 장기도 배워보라고 했더니 체스의 역사를 말하며 체스가 제일 좋다면서 휴대용 체스판을 들고 구석에서 체스를 두던 학생이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있는 학생을 봤는데, 휴대용 장기판을 사서 혼자 씨름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두는 법을 알려주고 한 판을 같이 두었다.
집이 가까워 기관에 꾸준히 왔던 학생이 있었다. 학생들의 다양성을 위해 간단한 로봇 수업을 했는데 갑자기 복잡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건 좀 어려운 거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학교 과제라 도와달라고 했다. 많은 시간을 도와주지 못했는데 어느 날 거의 완성된 차를 가지고 왔다. 기대한 것보다 잘 만들었다. 어떻게 했냐고 했더니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혼자 공부하면서 만들었다고 했다. 전국 과학경시대회에 자신의 차가 나가게 됐다고 했다. 시험기간과 겹쳐서 너무 힘들어 했다. 이곳도 입시 경쟁은 치열했다. 대회 성적이 가산점이 되었다. 처음에 재밌어서 혼자 공부하면서 하던 학생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글 맞춤법이 많이 틀려서 연습을 시켰었는데 만화가가 꿈이었던 이 학생은 베트남어로 쓴 소설을 보여주었다. 분량과 상상력에 놀라웠다.
수업에 거의 나오지 않는 학생이 있었는데 수필을 쓰는 시간에 쓴 글은 잘 써서 놀라게 했다. 한국어에 자신이 있으니 더 배우고 싶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수업 중에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된 학생은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상당히 잘했는데 새로운 영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의 뜻과 달리 계속적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는 자신의 무력감을 말했다. 학생의 장래와 여러 고려를 통한 것이겠지만 겨우 적응하고 사귄 친구들과 헤어지는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너 자신을 잃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이 두 학생과는 오래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수업은 한국어 말하기를 잘하는 학생들이라 쓰기를 위한 연습을 시켰다. 시, 수필을 써보았고 가능하면 소설까지 써보려 했지만 시간적으로 부족하였다. 하지만, 끝날 즘에 두 학생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 수업시간에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많이 틀려 놀랐지만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라고 생각했기에 다양한 사회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다. 기후변화, AI, 반도체, 청소년 문제, 세대 갈등 등 학생들이 직접 겪고 있는 것들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생각 밖으로 어려워할 것으로 생각했던 반도체, AI를 많이 기억하였고 재미있어 했다. 물로켓도 만들고 동영상도 만들고 음식도 만들었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아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좀 더 소화하기 쉽게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라온 환경에서 한국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베트남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어린 나이에 가난과 이별을 감당해야 했던 아픔이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문장을, 아름다운 목소리를, 해박한 지식을, 따뜻한 배려를, 놀라운 집중력을 자신의 안에 숨겨 두고 자신의 아픔으로 꽁꽁 감싸 두었다가 누군가 들어줄 때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것이다. 이들은 사춘기고 누군가 돌봐 주어야 할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다시 꿈을 꾸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길 바란다.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경계에서 일어났다. 동서양의 변방에서 헬레니즘이 피어났던 것처럼 그들은 한국과 베트남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새로운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