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 속 용산
막상 눈앞에서 마주한 방패와 철 마스크, 전경의 부릅뜬 눈은 무서웠다. ‘허가받은 곳까지만 행진하면 안 되나.’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2009년 2월, 용산참사 추모 미사 및 집회에서의 기억이다. 천주교 사제들이 앞장을 섰고 뒤이어 시위대가 평화적인 가두 행진을 벌였지만 경찰은 명동 근처까지 왔을 때 전경을 내세워 시위를 가로막았다. 여기까지 했으니 돌아가세요. 경찰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해산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려는 시위대와 비상시 복장을 하고 시위대를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전경 사이에서 엄청난 긴장감이 조성됐다. 곳곳에서는 폭력도 조금씩 발생했다. 신부님들이 그 가운데 껴서 몸싸움을 막으며 상황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결국 시위대는 그곳에서 행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점에서 조금 더 진행할 경우 당장 얻어맞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 행진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평화적인 집회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집회를 여는 쪽과 집회를 허가하는 쪽 양측이 집회의 한계를 정해놓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억압적인 정부는 보통 매우 제한적인 집회를 허용해놓고 ‘우리는 분명 집회를 허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집회, 퍼포먼스에 불과한 시위일 때를 뜻한다. 그 이상의 요구를 관철하려하면 물리적인 압력을 써서라도 막는다. 그렇다면 정부가 허가한 한도 내에서만 시위를 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그런 시위는 ‘그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는 자기위무를 줄지 몰라도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 그 순간에도 전경과 몸싸움을 벌여서라도 행진을 계속하자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끝까지 가보자고 외쳤던 이들에게는 집회와 시위를 정부에게 허가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고, 폭력을 동원해 그런 의지를 억압한다면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부당한 죽음에 함께 아파하고 그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를 향한 본능, 즉 인권 감수성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개의 문>은 우리의 인권 감수성을 건드린다. 장기 농성을 벌이며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자 했던 누군가의 절박한 용기, 결국 그 끝에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했던 누군가들의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은 그들의 상황에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한다. 그 양심은 너무 흔하게 쓰이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인권,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인권 감수성과 같은 말이다.
인권의 보편성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
굳이 세계인권선언이나 헌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생명을 존중 받을 권리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세계 곳곳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권은 종종 다른 가치와 대립하기 때문인데, 그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대원칙에 실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개의 문은 입장에 관한 영화다. 그래서 제목도 두개의 문이다. 철거민이 남일당 건물로 들어갔던 바로 그 문, 특공대원들이 침투했던 또 다른 문. 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강제 진압으로 죽은 철거민들이지만, 영화는 철거민들을 진압하려 했던 특공대원들도 희생자라고 말한다. 특공대원들과 철거민들이 당시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들어간 문은 달랐고 입장도 서로 달랐다. 그러나 불길과 화염 속에서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입장의 차이는 상황에 대한 고려다. 영화는 철거민들이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통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사고의 직접적 가해자로 보이는 특공대원들의 입장 또한 현장에 있었던 특공대원들과 목격자들의 진술을 통해서 구성한다.
만약 가해자를, 건물에 직접 들어가 진압 작전을 펼쳤던 특공대원들만으로 좁혀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해자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대원들 역시 상부의 명령을 따랐고, 건물 내부 상황과 사고의 위험성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떠밀려 투입됐다. 게다가 진압 과정에서 특공대원들 가운데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다.
그러나 영화가 ''그러므로 특공대원들에게 면죄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영화는 특공대원들 역시 스스로의 판단이 아닌 경로로 건물에 들어가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피해자라고 말한다. 영화가 두 개의 문, 두 개의 입장을 통해서 철거민도 특공대원도 피해자임을 조용히 보여주는 동안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은 입장의 고려를 넘어 지켜져야 하는 가치라고. 특공대원들에게는 그들만의 입장이 있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갈등하고 과오를 저지르게 했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고 말이다.
법리적 판단보다 중요한 것
영화에서 철거민측과 정부측 사이의 법적 공방에는 특공대원들이 처했던 상황 뒤에 숨어서 법리적 판단을 통해 어떻게든 면책해 보려는 국가가 보인다. 그러나 본질은, 그 상황에서 진압할 수밖에 없었고 죽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특공대원들의 입장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가능케 했던 정부와 경찰의 결정이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참혹했던 결과에 상관없이 침투작전 자체가 실로 부당한 것이다. 사망자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폭력적인 강제 진압을 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엄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철거민들이 인질을 잡고 있어 누군가의 생명이 당장 위험했던 것도 아니었고,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건물 밖으로 던져서 행인들의 안전에 위협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유도한 건 외려 경찰이었다. 철거민들의 점거 농성은 차라리 집회와 시위에 관한 권리였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전에 용산 참사 과정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애초부터 경찰에게는 철거민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든, 무력을 사용한 시위를 하든 중요하지 않았음을. 철거민들이 끝까지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건물을 점거하고 있는 한 진압작전은 강행됐을 것이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진행되는 법적 공방 장면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인권 의식을 똑똑히 보여준다. 검사는 진술을 하러 나온 특공대원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철거민들이 먼저 화재를 유도하지 않았나, 특공대는 화재의 위험을 모르고 있지 않았느냐. 검사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는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과, 화재를 발생하게 한 직접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이다. 이에, 법원은 검사의 논리를 따라 애초에 진압의 원인을 제공했고 인화성 물질을 갖고 있었던 철거민을 가해자로 규정한다. 이 모든 법적 과정에서 사람의 생명과 인권은 배제돼 있다. 법적 논리에 따른 책임 회피, 입장에 대한 고려만이 있을 뿐.
일찍이 많은 인권 연구자들은 인권이 법으로만 보장받을 때의 위험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나라 법 집행자들은 법은 알지만 인권을 모른다. 그러나 2009년 용산에서 죽어간 철거민들은 법적 지식은 없을지언정 인권을 본능적으로 더 잘 알고 있었다. <두개의 문> 후반부에 등장하는 철거민측 변호사와 특공대원의 진술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변호사: “건물 안에 있던 철거민 중 누군가가 ‘다죽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특공대원: “네. 그랬습니다.”
변호사: “그 말은 ‘다 죽어버려라.’는 뜻이었습니까, ‘여기 올라오면 다 죽는다.’는 뜻이었습니까?”
특공대원: “지금 생각해보니 후자였던 것 같습니다.”
변호사: “그러니까 올라오면 다 죽으니 오지 말라는 뜻이었단 거죠? 그런데 왜 검찰 조사에서는 ‘다 죽어버려라.’는 뜻이었다고 진술했습니까?”
특공대원: “지금 돌이켜보면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적개심 때문에 그랬습니다.”
철거민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후 인권을 떠올려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알았다. 법적 논리, 법적 판단 위에 인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을 때 힘 있는 집단이 합법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벌일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이 지닌 인권 감수성을, 단지 사안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거대 집단은 그토록 쉽게 잊는 것일까?
우리의 기억 속 용산
막상 눈앞에서 마주한 방패와 철 마스크, 전경의 부릅뜬 눈은 무서웠다. ‘허가받은 곳까지만 행진하면 안 되나.’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2009년 2월, 용산참사 추모 미사 및 집회에서의 기억이다. 천주교 사제들이 앞장을 섰고 뒤이어 시위대가 평화적인 가두 행진을 벌였지만 경찰은 명동 근처까지 왔을 때 전경을 내세워 시위를 가로막았다. 여기까지 했으니 돌아가세요. 경찰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해산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려는 시위대와 비상시 복장을 하고 시위대를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전경 사이에서 엄청난 긴장감이 조성됐다. 곳곳에서는 폭력도 조금씩 발생했다. 신부님들이 그 가운데 껴서 몸싸움을 막으며 상황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결국 시위대는 그곳에서 행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점에서 조금 더 진행할 경우 당장 얻어맞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 행진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평화적인 집회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집회를 여는 쪽과 집회를 허가하는 쪽 양측이 집회의 한계를 정해놓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억압적인 정부는 보통 매우 제한적인 집회를 허용해놓고 ‘우리는 분명 집회를 허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집회, 퍼포먼스에 불과한 시위일 때를 뜻한다. 그 이상의 요구를 관철하려하면 물리적인 압력을 써서라도 막는다. 그렇다면 정부가 허가한 한도 내에서만 시위를 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그런 시위는 ‘그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는 자기위무를 줄지 몰라도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 그 순간에도 전경과 몸싸움을 벌여서라도 행진을 계속하자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끝까지 가보자고 외쳤던 이들에게는 집회와 시위를 정부에게 허가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고, 폭력을 동원해 그런 의지를 억압한다면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부당한 죽음에 함께 아파하고 그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를 향한 본능, 즉 인권 감수성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두개의 문>은 우리의 인권 감수성을 건드린다. 장기 농성을 벌이며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자 했던 누군가의 절박한 용기, 결국 그 끝에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했던 누군가들의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은 그들의 상황에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한다. 그 양심은 너무 흔하게 쓰이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인권,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인권 감수성과 같은 말이다.
인권의 보편성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
굳이 세계인권선언이나 헌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생명을 존중 받을 권리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세계 곳곳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권은 종종 다른 가치와 대립하기 때문인데, 그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대원칙에 실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개의 문은 입장에 관한 영화다. 그래서 제목도 두개의 문이다. 철거민이 남일당 건물로 들어갔던 바로 그 문, 특공대원들이 침투했던 또 다른 문. 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강제 진압으로 죽은 철거민들이지만, 영화는 철거민들을 진압하려 했던 특공대원들도 희생자라고 말한다. 특공대원들과 철거민들이 당시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들어간 문은 달랐고 입장도 서로 달랐다. 그러나 불길과 화염 속에서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입장의 차이는 상황에 대한 고려다. 영화는 철거민들이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통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사고의 직접적 가해자로 보이는 특공대원들의 입장 또한 현장에 있었던 특공대원들과 목격자들의 진술을 통해서 구성한다.
만약 가해자를, 건물에 직접 들어가 진압 작전을 펼쳤던 특공대원들만으로 좁혀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해자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대원들 역시 상부의 명령을 따랐고, 건물 내부 상황과 사고의 위험성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떠밀려 투입됐다. 게다가 진압 과정에서 특공대원들 가운데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다.
그러나 영화가 ''그러므로 특공대원들에게 면죄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영화는 특공대원들 역시 스스로의 판단이 아닌 경로로 건물에 들어가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피해자라고 말한다. 영화가 두 개의 문, 두 개의 입장을 통해서 철거민도 특공대원도 피해자임을 조용히 보여주는 동안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은 입장의 고려를 넘어 지켜져야 하는 가치라고. 특공대원들에게는 그들만의 입장이 있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갈등하고 과오를 저지르게 했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고 말이다.
법리적 판단보다 중요한 것
영화에서 철거민측과 정부측 사이의 법적 공방에는 특공대원들이 처했던 상황 뒤에 숨어서 법리적 판단을 통해 어떻게든 면책해 보려는 국가가 보인다. 그러나 본질은, 그 상황에서 진압할 수밖에 없었고 죽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특공대원들의 입장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가능케 했던 정부와 경찰의 결정이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참혹했던 결과에 상관없이 침투작전 자체가 실로 부당한 것이다. 사망자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폭력적인 강제 진압을 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엄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철거민들이 인질을 잡고 있어 누군가의 생명이 당장 위험했던 것도 아니었고,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건물 밖으로 던져서 행인들의 안전에 위협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유도한 건 외려 경찰이었다. 철거민들의 점거 농성은 차라리 집회와 시위에 관한 권리였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전에 용산 참사 과정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애초부터 경찰에게는 철거민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든, 무력을 사용한 시위를 하든 중요하지 않았음을. 철거민들이 끝까지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건물을 점거하고 있는 한 진압작전은 강행됐을 것이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진행되는 법적 공방 장면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인권 의식을 똑똑히 보여준다. 검사는 진술을 하러 나온 특공대원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철거민들이 먼저 화재를 유도하지 않았나, 특공대는 화재의 위험을 모르고 있지 않았느냐. 검사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는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과, 화재를 발생하게 한 직접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이다. 이에, 법원은 검사의 논리를 따라 애초에 진압의 원인을 제공했고 인화성 물질을 갖고 있었던 철거민을 가해자로 규정한다. 이 모든 법적 과정에서 사람의 생명과 인권은 배제돼 있다. 법적 논리에 따른 책임 회피, 입장에 대한 고려만이 있을 뿐.
일찍이 많은 인권 연구자들은 인권이 법으로만 보장받을 때의 위험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나라 법 집행자들은 법은 알지만 인권을 모른다. 그러나 2009년 용산에서 죽어간 철거민들은 법적 지식은 없을지언정 인권을 본능적으로 더 잘 알고 있었다. <두개의 문> 후반부에 등장하는 철거민측 변호사와 특공대원의 진술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변호사: “건물 안에 있던 철거민 중 누군가가 ‘다죽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특공대원: “네. 그랬습니다.”
변호사: “그 말은 ‘다 죽어버려라.’는 뜻이었습니까, ‘여기 올라오면 다 죽는다.’는 뜻이었습니까?”
특공대원: “지금 생각해보니 후자였던 것 같습니다.”
변호사: “그러니까 올라오면 다 죽으니 오지 말라는 뜻이었단 거죠? 그런데 왜 검찰 조사에서는 ‘다 죽어버려라.’는 뜻이었다고 진술했습니까?”
특공대원: “지금 돌이켜보면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적개심 때문에 그랬습니다.”
철거민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후 인권을 떠올려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알았다. 법적 논리, 법적 판단 위에 인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을 때 힘 있는 집단이 합법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벌일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이 지닌 인권 감수성을, 단지 사안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거대 집단은 그토록 쉽게 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