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의 자유를 지키는 힘

201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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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앞 쌍용차 분향소 철거 - 집회의 자유를 위해 연대의 힘을 모아야 할 때


얼마 전 서울 중구청은 쌍용자동차 희생자들을 위한 대한문앞 분향소를 강제철거한 뒤, 이에 항의하는 농성자들을 대거 연행했다. 그리고 뒤이어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을 구속했다. 구청의 분향소 철거작업을 방해했다는 혐의였다. 김정우 지부장이 구속된 뒤 대한문 앞에서는 문화제 성격의 집회가 계속됐지만 이마저도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쌍용차 범국민대책위가 경찰의 대한문 앞 옥외집회금지 통고에 대해 집행중지 신청을 냈고 이를 행정법원이 기각했기 때문이다. 분향소는 철거되기 전에도 이미 호시탐탐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고 분향소가 있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열린 모든 집회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진행돼 왔다.

“완벽한 감시가 목적이라면 감시당하는 사람은 한시도 쉬지 않고 감시의 눈길 아래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은, 감시당하는 사람이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이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제레미 벤담, <파놉티콘>

위 인용문은 현재 공권력이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묘사한 문장과도 같다. 경찰은 집회가 얼마나 성가시고 만만치 않은 것인지 시민들과 집회 참가자들이 피부로 느끼게 함으로써 집회의 자유가 실현될 공간을 점차 소거해왔다. 공적 공간에서 집회를 열려는 자는 우선, 집회 신고서에 집회의 본래 목적인 정치적이며 시민적인 요구가 아닌 문화적인 집회를 한다는 내용을 기재하도록 1차 자기검열을 거친다. 신고라는 검열을 통과한 후에는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의 두 배가 넘는 숫자의 경찰들에 둘러싸인 채 ‘문화제’를 진행해야 한다. 집회를 시작한지 2시간여 지나면 경찰은 해산 명령을 내리고 명령에 불복할 경우 무력사용이 시작된다. 2009년 야간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 조항에 대해 헌재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이후, 정부는 야간 옥외집회는 허용하나 사전에 신고를 하도록 하는 신고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허가제다. 게다가 집회는 문화, 예술적 행사 명목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내용적인 제한이 있다. 무엇보다 집회에 동원되는 경찰력은 그 규모만으로 집회 참가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효과를 낸다.

무서운 것은 줄어든 자유에 시민들이 적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에서 집회는 시민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제란 허울을 쓴 채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 이 적응을 잘 말해준다.

 

지난 6월 10일 쌍용차 분향소를 기습철거한 뒤 분향소 자리를 점거한 경찰 (출처: 금속노조 http://metalunion.kr/index.php)

 

집회의 존재 이유

집회의 자유는 시민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시민적 성격의 권리이며, 시민으로서 요구하는 바를 정부나 국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정치적 권리이다. 대의 민주주의가 협소하게 보장하는 정치 참여를 비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본권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또 통상적으로 자유권은 사회적‧문화적‧경제적 권리(사회권)보다 기본권에 더 가까운 권리로 여겨지지만 이러한 자유권이 점점 위협받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다. 세계화와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각국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회권 차원의 구제는커녕 소외된 이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자유권, 즉 집회를 열고 분노를 표현하며 생존권을 정당하게 요구할 권리마저 묵살한다.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 철거는 그 야만적인 행태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집회 현장에 가보지 못한 시민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게 되는 집회의 이미지는 ‘시위꾼’들과 정부의 싸움의 현장, 강성 노조의 투쟁 현장이다. 이는 대부분 평화로운 집회조차 제대로 열 수 없게 만드는 경찰의 과잉 대응에서 기인한다. 특히 집회의 자유는 국가권력 및 자본권력에 의해 기본적이고 사회 경제적인 자원에서 소외되는 시민들의 직접 행동, 직접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최후의 보루다. 최근 몇 년 간 집회의 자유가 침해 받은 사안은 대부분이 자본 권력에 대항한 시위와 집회였다. 한진 중공업, 쌍용자동차, 재능 노조의 투쟁이 대표적인 예다. 실은 광장이나 대한문 앞 집회 장소는 시민이 국가와 싸우는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의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부는 집회를 사전에 검열하는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폭력행위가 없는 평화적인 집회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으면서 시위대들을 사적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로 몰아붙인다. 그럴수록 정부가 그토록 원하는 안보를 해치지 않는 평화적인 집회란 쟁투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집회를 폭력적으로 만든 건 정부다.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최선은 ‘연대’

촛불집회 이후로 강경 일변도였던 정부의 집회 탄압 방침 때문일까. 시민들은 집회에 대한 정부의 과잉 대응과 축소된 집회의 자유에 정말로 적응한 듯 보인다. 2011년 한진 중공업 대량해고 사태의 해결을 위한 대규모 연대집회였던 희망버스를 제외하고는 많은 시민의 동참을 이끌어낸 집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집회 장소에서 서러운 대접을 받고 인권 침해를 당하는 시위자들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건 경찰의 물리력이 아니라 텅 빈 집회장소와 경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연대시민들의 부재일지 모른다. 집회는 집회를 여는 사람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정치적인 광장이기도 하다. 왜 자유권을 시민적 정치적 권리라 부를까? 자유권에 속하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는 자유롭게 연대할 권리, 그럼으로써 공동체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2003년 헌법재판소는 “집회의 자유는 공동으로 인격을 발현하기 위하여 타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자유, 즉 타인과의 의견교환을 통하여 공동으로 인격을 발현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권이자 동시에 국가권력에 의하여 개인이 타인과 사회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본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헌재 결정/2003.10.30)

집회의 자유를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은 정부가 자발적으로 모든 종류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현실적으로 가장 유용한 길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권리 요구자들의 집회에 연대의 몸짓을 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시민이 자신의 자유권과 기타 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대한문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집회가 노동권 박탈 및 기업의 인권침해와 관련한 일이었는데, 현재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임금 노동자의 47.8%(2012년 기준)에 이른다. 우리 모두의 인권 이슈인 셈이다.

지금도 대한문 앞에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매일같이 나와 삶의 자리를, 자유의 자리를 지킨다. 경찰이 낸 옥외집회금지 신청에 법원이 동의한 셈이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투쟁 의지를 밝혔다. 집회의 자유를 자신들 입맛대로 제한하는 공권력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다수 시민의 힘이다. 이를 알고, 그간 시민을 대신해 우리사회의 집회의 자유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이들에게 연대를 통해서 보답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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