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 발효 1주년, 그 의미를 되짚다
- 김기원(KOCUN 활동가)
“국제체계상 인권보호의 역사적 간극을 메우는 이 선택의정서는…
보편적 인권 역사의 진정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 나비 필레이(Navi Pillay), 유엔인권최고대표
듣기 좋은 말이라 수긍은 가는데, 사실 그닥 와닿지는 않는. 국제협약이 좀 그렇다. 특히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는 좀 더 그렇다. '사회권'도 어렵고, '선택의정서'도 생소하고. 내용과 절차, 몽땅 복잡한 녀석이라 필자에게도 아직 국제협약계의 골리앗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사실은 다윗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도 다가가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 즉 지키고자 하는 권리들의 성격과 역사적으로 각국 정부로부터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지키고자 하는 권리'들을 통칭하여 사회권이라 하는데, 사회권이란 무엇인가. N사의 국어사전에서 검색해보니,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사회적 보장책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나온다. 음, 별로다. 굉장히 별로다. 초짜인 내가 봐도 이건 사회권이 아니야.
첫째로, 사회권도 인권의 한 분야로, '인권'이라 하면 말 그대로 인간이기에 주어지는 권리이다. 그런데 위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국민만이 인간이다. 사회권위원회를 포함해 모든 유엔 조약기구에서는 협약의 적용범위가 '관할권 내 모든 사람'임을 누차 강조해왔다.
둘째로, 사회권은 '사회적 보장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권규약의 정식명칭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으로, 사회권에는 협약에서 보장하는 모든 권리가 포함된다. 영어로만 옮겨보아도 확연히 다르다. 사회적 보장은 'social security', 사회권은 'social rights', 수식으로 표현하면 '사회권⊃사회보장'이다. 실제로 사회보장은 사회권규약 내 하나의 조항,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이다.
▲ '사회권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고 외치는 일러스트 (출처: ACRI)
마지막으로, '요구할 권리'도 문제다. 단순히 요구만 할 수 있고 그 요구에 따라 보장해주고 말고는 국가가 선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란 말인가? 아니다. 사회권은 모든 사람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더욱 중요하게는 보장받아야할 권리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권은 '권'자를 단 의미가 하나도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사회권은 자유권과는 달리 각국 정부가 점진적으로 이행해도 된다는 일종의 합의가 된 바 있다. 이는 각국의 상황이, 특히나 경제적 상황이 다른데 의료비를 지원해주거나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등의 문제는 국가재정 및 자원과 결부되어 논의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에서다. 그래서 협약의 이행은 어느정도 선에서는 각국 정부의 재량에 맡긴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고 유엔의 다른 인권조약들도 사회권의 점진적 이행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진성'은 결코 이행시기를 늦출 수 있다는 말은 아니고 완전하게 권리가 실현되려면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일 뿐, 이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당장부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분명 자유권과 사회권은 출발시점이 1966년으로 같았다. 그런데 출발조건이 달랐다. 경주에 빗대자면, 자유권은 그냥 달리는데 사회권은 타이어를 끌게한 셈이다. 마치 자유권은 침해만 하지 않으면 이행되는 문제, 사회권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야만 하는 문제로 인식하게끔 했다. 전자를 소극적 권리, 후자를 적극적 권리로 부르는데, 사실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지 의심해봐야 할 문제다.
▲ 깨끗한 식수에 대한 접근을 예로 점진적 이행을 설명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누리지 못하거나 충분히 누리지 못함 → 여전히 위험에 노출된 집단 존재 → 모두가 지속가능하게 접근 가능함
모든 인권은 상호의존적이며 불가분성의 원칙을 따른다. 말 그대로, 자유권을 향유하는데 사회권이 필요하며 역으로도 마찬가지라는 말이고, 이 때문에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래야 할 수 없다. 일례로, 아무리 자원이 넘치는 국가라고 해도 만일 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이는 종교적 차이에 기반한 사회적 차별로,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수준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와닿는 문제일 수 있을까?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도 않은 권리를, 단순히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향유하고 보장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회권과 자유권에 대한 정치․이론적 경계선은 이후의 국제인권법 지형에도 영향을 끼쳤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과 같은 개인진정 제도를 유엔인권메커니즘도 갖고 있는데, 대게 이러한 절차는 앞서 언급된 ‘선택의정서’를 통해 수립된다. 즉, 특정 협약의 선택의정서는 개인 또는 집단이 협약상 보장된 권리의 침해에 대해 관련 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개인진정에 관한 자유권규약 제1선택의정서는 협약과 동일하게 1966년에 채택된데 반해, 같은 내용을 다루는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는 2008년에 되어서야 채택됐다. 이는 사회권이 '가용자원의 한도 내'에서 이행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개인이 침해를 당했다 하더라도 국제사회가 각국 정부에 국제법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2008년, 유엔 인권이사회는 왜 불현듯 선택의정서를 채택했을까? 전문을 보면, '세계인권선언과 양대 국제인권규약은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시민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생성되어야지만 달성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사회권)규약의 목적과 그 조항들의 이행을 보다 잘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권위원회가 본 의정서에 따른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 이는 유엔 제네바 본부 내에 걸려있는 세계인권선언 벽화 시리즈 중 하나로,
존엄성 보호와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다윗은 어렵게, 어렵게 다시 자유권과 얼추 비슷한 선상에 있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우리가 무척 아껴줘야 하는 문서다. 돈이 관여된 문제에 있어서 ‘이성적’ 혹은 ‘합리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마치 '단지 돈이 없으니 어쩌겠어.'하는 식의 지극히 자기정당화적인 논리를 우리가 하나의 집단으로써 얼마나 사용하고, 또 용인했는지 보여주는 세계사적 증거임과 동시에,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패러다임의 변화, 희망적 진보를 상징하기도 한다.
단순히 이렇게 역사적,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된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국내 사회구성원들의 더 나은 사회권 보장을 위해 이 선택의정서는 분명 필요하다. 왜인즉, 비준을 했다는 것은 곧 국가인권위원회도, 법원도, 국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개인의 인권침해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유엔 마크가 그려진 지푸라기라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다윗을 위해 지푸라기가 되어줄 국제인권조약계의 다윗,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이...긴 한데 여전히 확신은 없다. 끝.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 발효 1주년, 그 의미를 되짚다
- 김기원(KOCUN 활동가)
“국제체계상 인권보호의 역사적 간극을 메우는 이 선택의정서는…
보편적 인권 역사의 진정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 나비 필레이(Navi Pillay), 유엔인권최고대표
듣기 좋은 말이라 수긍은 가는데, 사실 그닥 와닿지는 않는. 국제협약이 좀 그렇다. 특히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는 좀 더 그렇다. '사회권'도 어렵고, '선택의정서'도 생소하고. 내용과 절차, 몽땅 복잡한 녀석이라 필자에게도 아직 국제협약계의 골리앗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사실은 다윗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도 다가가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 즉 지키고자 하는 권리들의 성격과 역사적으로 각국 정부로부터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지키고자 하는 권리'들을 통칭하여 사회권이라 하는데, 사회권이란 무엇인가. N사의 국어사전에서 검색해보니,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사회적 보장책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나온다. 음, 별로다. 굉장히 별로다. 초짜인 내가 봐도 이건 사회권이 아니야.
첫째로, 사회권도 인권의 한 분야로, '인권'이라 하면 말 그대로 인간이기에 주어지는 권리이다. 그런데 위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국민만이 인간이다. 사회권위원회를 포함해 모든 유엔 조약기구에서는 협약의 적용범위가 '관할권 내 모든 사람'임을 누차 강조해왔다.
둘째로, 사회권은 '사회적 보장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권규약의 정식명칭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으로, 사회권에는 협약에서 보장하는 모든 권리가 포함된다. 영어로만 옮겨보아도 확연히 다르다. 사회적 보장은 'social security', 사회권은 'social rights', 수식으로 표현하면 '사회권⊃사회보장'이다. 실제로 사회보장은 사회권규약 내 하나의 조항,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이다.
▲ '사회권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고 외치는 일러스트 (출처: ACRI)
마지막으로, '요구할 권리'도 문제다. 단순히 요구만 할 수 있고 그 요구에 따라 보장해주고 말고는 국가가 선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란 말인가? 아니다. 사회권은 모든 사람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더욱 중요하게는 보장받아야할 권리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권은 '권'자를 단 의미가 하나도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사회권은 자유권과는 달리 각국 정부가 점진적으로 이행해도 된다는 일종의 합의가 된 바 있다. 이는 각국의 상황이, 특히나 경제적 상황이 다른데 의료비를 지원해주거나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등의 문제는 국가재정 및 자원과 결부되어 논의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에서다. 그래서 협약의 이행은 어느정도 선에서는 각국 정부의 재량에 맡긴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고 유엔의 다른 인권조약들도 사회권의 점진적 이행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진성'은 결코 이행시기를 늦출 수 있다는 말은 아니고 완전하게 권리가 실현되려면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일 뿐, 이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당장부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분명 자유권과 사회권은 출발시점이 1966년으로 같았다. 그런데 출발조건이 달랐다. 경주에 빗대자면, 자유권은 그냥 달리는데 사회권은 타이어를 끌게한 셈이다. 마치 자유권은 침해만 하지 않으면 이행되는 문제, 사회권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야만 하는 문제로 인식하게끔 했다. 전자를 소극적 권리, 후자를 적극적 권리로 부르는데, 사실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지 의심해봐야 할 문제다.
▲ 깨끗한 식수에 대한 접근을 예로 점진적 이행을 설명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누리지 못하거나 충분히 누리지 못함 → 여전히 위험에 노출된 집단 존재 → 모두가 지속가능하게 접근 가능함
모든 인권은 상호의존적이며 불가분성의 원칙을 따른다. 말 그대로, 자유권을 향유하는데 사회권이 필요하며 역으로도 마찬가지라는 말이고, 이 때문에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래야 할 수 없다. 일례로, 아무리 자원이 넘치는 국가라고 해도 만일 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이는 종교적 차이에 기반한 사회적 차별로,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수준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와닿는 문제일 수 있을까?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도 않은 권리를, 단순히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향유하고 보장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회권과 자유권에 대한 정치․이론적 경계선은 이후의 국제인권법 지형에도 영향을 끼쳤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과 같은 개인진정 제도를 유엔인권메커니즘도 갖고 있는데, 대게 이러한 절차는 앞서 언급된 ‘선택의정서’를 통해 수립된다. 즉, 특정 협약의 선택의정서는 개인 또는 집단이 협약상 보장된 권리의 침해에 대해 관련 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개인진정에 관한 자유권규약 제1선택의정서는 협약과 동일하게 1966년에 채택된데 반해, 같은 내용을 다루는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는 2008년에 되어서야 채택됐다. 이는 사회권이 '가용자원의 한도 내'에서 이행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개인이 침해를 당했다 하더라도 국제사회가 각국 정부에 국제법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2008년, 유엔 인권이사회는 왜 불현듯 선택의정서를 채택했을까? 전문을 보면, '세계인권선언과 양대 국제인권규약은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시민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생성되어야지만 달성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사회권)규약의 목적과 그 조항들의 이행을 보다 잘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권위원회가 본 의정서에 따른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 이는 유엔 제네바 본부 내에 걸려있는 세계인권선언 벽화 시리즈 중 하나로,
존엄성 보호와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다윗은 어렵게, 어렵게 다시 자유권과 얼추 비슷한 선상에 있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우리가 무척 아껴줘야 하는 문서다. 돈이 관여된 문제에 있어서 ‘이성적’ 혹은 ‘합리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마치 '단지 돈이 없으니 어쩌겠어.'하는 식의 지극히 자기정당화적인 논리를 우리가 하나의 집단으로써 얼마나 사용하고, 또 용인했는지 보여주는 세계사적 증거임과 동시에,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패러다임의 변화, 희망적 진보를 상징하기도 한다.
단순히 이렇게 역사적,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된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국내 사회구성원들의 더 나은 사회권 보장을 위해 이 선택의정서는 분명 필요하다. 왜인즉, 비준을 했다는 것은 곧 국가인권위원회도, 법원도, 국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개인의 인권침해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유엔 마크가 그려진 지푸라기라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다윗을 위해 지푸라기가 되어줄 국제인권조약계의 다윗,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이...긴 한데 여전히 확신은 없다. 끝.